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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자료

한능검 고급 31회 주요 key word 배경지식(1)

by 움베르토 에코 2021.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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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 수양개 6지구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빗살무늬토기·주먹도끼 등이 출토된 생활유적. 사적.

 

이 유적은 남한강 상류의 강가에 있는 양달유적으로 해발 132m에 있다. 충주댐 수몰지역 지표조사의 일환으로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19801981년에 발견하고, 19831985년까지 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유적이 위치한 주변 지역은 석회암동굴과 강을 낀 자연환경으로, 선사인의 살림터로 알맞은 곳이다. 제원 점말용굴·단양 상시바위그늘·금굴 유적 등이 가까이에 있다. 수양개 유적 둘레는 높고 낮은 산으로 둘려져 있고, 유적의 동남쪽으로 강물이 흐른다. 이 유적을 구성하는 암석은 조선계(朝鮮系) 대석회암통(大石灰巖統) 위에 사암·셰일을 수반하는 대동계(大同系) 반송통(盤松統)이 놓이고, 그 뒤 제4계에 충적층이 쌓인 곳으로, 특히 석회암지대가 잘 발달된 곳이다.

지금까지의 조사로, 중기구석기청동기시대까지 5개의 문화층이 층위(層位)를 이루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약 20분의 185정도가 발굴되었으며, 강안단구(江岸段丘)의 비탈에 이루어진 무늬토기층(ㅁ층)과 구석기문화층(ㄱ층·ㄴ층), 청동기시대문화층 등이 드러났다.

빗살무늬토기층(ㅁ층)은 고운모래흙층으로 돌도끼와 빗살무늬토기조각이 발견되었다. 돌도끼의 갈기수법과 빗살무늬토기의 무늬형식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중기나 후기에 발달한 층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신석기 문화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타제돌도끼·화살촉·그물추 등 문화성격이 뚜렷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는 홈자귀·대팻날·민무늬토기 밑바닥이 발굴되어 층위구분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다.

구석기문화층(ㄱ층·ㄴ층)은 노란갈색흙층(10YR4·45·6)으로 땅갈라짐(mudcracks)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석장리 후기 구석기시대 집자리와 청원 샘골 유적과 같이 따뜻한 기후를 가지는 빙간기에 해당된다. 이 층에 발달한 문화는 출토유물의 상태와 성격으로 보아 시기를 달리해 문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유물의 재료는 위(아래()층 모두 규암·셰일·규암질셰일·유문암이 많이 쓰였고, 석영·규장암·흑요석 등이 조금씩 쓰였다.

구석기시대의 위() 문화층은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층으로 2개의 층위로 나뉜다. 아래층은 후기구석기의 전·중기에 해당하고, 윗층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후기 문화층으로 해석된다. 유물의 재료는 셰일(shale)로서, 유적에서 약 1.5km 떨어진 산제골에서 날라와 연모를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유물 중 주먹도끼는 프랑스·알제리에서 출토된 유물과는 형태와 수법이 비슷하여 큰 관심을 가지게 한다. 이 외에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주먹칼을 비롯하여 안팎날찍개, 다양한 형태의 슴베석기·둥근밀개·긁개가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간접떼기와 잔솔질을 정교하게 베풀어 만든 긁개·밀개·새기개·찌르개·배밑모양(care·ne)의 돌날몸돌·작은돌날 등 전형적인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을 내는 층으로 격지연모가 많다.

또한 많은 수의 흑요석은 원산지문제와 이와 관련된 교역·이동의 자료로 제시된다. 작은 돌날몸돌 중 다듬은 타면을 가지는 배모양 긁개는 일본의 유우베스[湧別川]수법보다 앞선 것으로, 석장리의 새기개·밀개 문화층과 집자리의 유물과 비교된다. 작은 돌날몸돌과 배모양 전통의 석기는 우리나라와 시베리아·북중국·몽고·일본 등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이 수법의 전파문제를 새롭게 제시한다.

맨 아래층()의 중기 구석기 문화층은 주로 사암(砂岩규암(硅岩이판암(泥板岩)으로 구성된 자갈층 위에 발달하였다. 석기제작 수법은 모룻돌을 이용한 직접떼기나 던져떼기로서, 2차 잔손질을 가한 것이며, 석기는 대체로 무겁고 큰 편으로 잔손질한 흔적이 별로 관찰되지 않는다.

아래() 문화층은 중기 구석기시대의 전통을 강하게 가지는 유물을 내는 층으로, 석기제작소 및 모루·망치·몸돌·격지 등 석기제작방법의 복원자료가 발굴되었다. 또한 다양한 연모제작수법이 보이며, 다목적 석기가 적고 1연모 1기능의 단순연모가 많다.

엇갈림떼기를 베풀어 코일식의 안팎날을 만든 주먹도끼와 S자형 휘임날을 만든 편도(扁桃)모양 주먹도끼 및 규암질셰일 판자돌의 원석(原石)에 돌려떼기를 베풀어 만든 다능선의 둥근 몸돌 등은 아슐리안 전통의 무스테리안문화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프리즘모양과 의사(疑似) 르바루아몸돌 및 짝이 맞는 격지들도 나왔다.

의의와 평가

수양개 유적은 크게 후기 구석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에 걸친 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석장리·전곡리·명오리·창내 유적과 같이 강가의 양달유적으로서 석기제작방법의 복원자료와 문화의 연계·전파 등 구석기문화를 폭넓게 이해하는 자료를 제시해 주었다. 또한 많은 숯의 출토로 보아 집자리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주먹도끼, 찌르개, 슴베 등이 있는데, 특히 주먹도끼는 대개 아슐리안 계통의 무스베리안 형식과 유사하다.

위 문화층은 전형적인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로 석장리 집자리층·창내 유적과 견줄 수 있고, 아래 문화층은 중기 구석기시대의 전통을 지닌 유적으로 구석기시대 중기에서 이른 후기 구석기시대에 놓인다.

이 유적은 부근의 점말용굴·상시바위그늘·도담금굴·명오리·창내 유적 등 중부지방에 발달한 구석기문화와 상호 비교연구 및 동북아시아의 구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그리고 후기구석기시대의 문화층에서 출토되는 배모양밀개·흑요석석기는 주변의 중국·일본 유적과 비교연구로 그 문화전파의 이동경로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수양개 6지구에서는 눈금 새겨진 돌, 웃는 얼굴 등 구석기인 정신세계를 반영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2011~2014년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수양개 6지구에서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슴베찌르개 등 15000여점의 유물을 출토했다.

 

42천년 전에 발굴된 수양개 6지구 4문화층에서 출토된 슴베찌르개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찌르개로서, 기능에 대한 분석결과 찌르는 기능(사냥)과 함께 유물의 반 정도는 자르는 기능도 갖고 있음을 확인해, 복합 연모를 다기능으로 사용한 현대 인류의 지혜와 문화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수양개 6지구는 아시아후기구석기전기(EUP)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등장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결국 주먹 도끼로 대표되는 연천 전곡리가 전기 구석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라면 슴베찌르개로 대표되는 수양개 6지구는 후기 구석기 대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112

112(一責十二法)부여의 법률로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도록 한 것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서 부여의 형벌이 매우 엄격하였다고 평하며, 4조목의 법에 대한 기록을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도둑질을 하였을 때 12배를 갚아야 한다"(竊盜一責十二)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부여에 사유재산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고조선의 팔조금법과 유사한 응보주의 원리 역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에도 유사한 법률이 있었다. 신당서동이열전에는 "(고구려에서) 도둑질한 자는 열배로 갚아야 한다"(盜者十倍取償)라고 전하고 있으며, 같은 기록이 주서, 수서, 북사의 고구려전에도 전한다. 구당서고구려전에는 열배 대신 열두배로 기록되어 있다.[2]

 

한편 고구려와 함께 부여계 국가인 백제의 경우 주서북사"도둑질을 한 자는 귀양보내고 그 2배를 징수한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는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하면 3배를 배상"하도록 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112법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절도에 대한 응보의 원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부여의 영향이 확인된다.

 

읍군/3

초기 국가의 지배자 칭호. ()와 옥저(沃沮)에서 보이며, 하호(下戶)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예조(濊條)에 보인다. 예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대신 후(삼로(三老)와 함께 읍군(邑君)이라는 관리가 있어 이들이 하호(下戶)를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한조(韓條)에는 경초연간(景初年間, 237239)에 명제(明帝)가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몰래 파견하여 낙랑·대방의 두 군을 평정하고, 우리나라의 여러 신지(臣智)들에게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주고, 그 다음 사람들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로 보아 읍군·읍장은 삼로· 등과 함께 토착민 세력의 규모와 크기에 따라 구분되어 봉해진 중국식 관직명으로 여겨진다.

 

, 후한서(後漢書)한조에서는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소마시(蘇馬諟)를 한()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켜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읍군이라는 명칭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지 / 읍차

신지(臣智)와 읍차(邑借)삼한의 군장 칭호 가운데 각각 하나이다.

 

삼국지》 〈위지(魏志) 변진전(弁辰傳)에 따르면, 큰 나라의 우두머리를 신지, 그 다음은 검측, 맨 하급을 읍차로 불렀다. 이들 칭호는 격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장수에 대한 칭호로, 그 중 가장 높고 유력한 것이 신지였다.

 

큰 나라의 우두머리는 신지를 비롯하여 진지(秦支축지(蹴支) 등으로 불렸고, 그럭저럭 규모가 있는 나라는 검측(儉側) 및 험측(險側견지(遣支건길지(鞬吉支) 등으로 불렸다. 가장 규모가 작은 나라의 우두머리는 읍차(邑借)라 했고, 그 밖에도 번예(樊穢)라는 호칭이 있었다.

 

부경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나라에 큰 창고가 없으며, 집집마다 각기 조그만 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본디 ()’은 한자의 창고를 나타내는 말로 짐작된다.

 

이것이 백제에 영향을 끼쳐서 창고사무를 맡은 내관(內官) 소속의 관청 이름을 경부(广+京 部)라고 부르게 된 듯하다. 비록 북사(北史)94 백제전에는 이를 내략부(內掠部외략부(外掠部)라 했으나, 한원(翰苑)30 백제조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는 각기 내경부(內椋部외경부(外椋部)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40 직관지(職官志)에도 이 경()이 경(广+)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경은 일본어 경(, クラ)이 그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 수도였던 집안(集安) 일대에는 당시 어느 가옥이나 본채 옆에 2층으로 된 작은 창고가 있었다.

 

이는 얇은 목재를 가로 또는 세로로 엮어서 다락식 창고 형태로 지은 것인데, 현지에서는 옥미창(玉米倉) 혹은 포미창(包米倉)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옥미창은 특히 만보정묘구(萬寶汀墓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옛 강서군(江西郡) 덕흥리 벽화고분에 보이는 2층 다락집도 이와 모양이 비슷하다.

 

한편, 집안의 미선구(麻線溝) 1호묘에 보이는 귀틀집(高床式 건물)은 일본의 쇼소잉[正倉院] 쌍창(雙倉)으로 연결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창고의 존재는 많은 것을 알려준다.

 

1. 사유재산의 존재 - 지배 계급

2. 집집마다 개인의 창고 - 1년내내 먹을것이 풍족하지 못하다 - 큰산, 골짜기가 많고, 밭은 없다. 약탈경제 추정가능

 

3. 진대법까지 연결가능

고구려의 진대법 : 194년 고국천왕때 을파소의 건의로 시행 - 고구려의 빈민구제 기구 - 춘대추납 기구 ( 나라에 창고가 있어야 가능함)

 

** 고려 의창, 조선의 의창, 환곡, 사창제도와 연결

 

동시전 / 경시서 / 평시서 / 평식원

동시전-(             ) - (             ) - (               )

               고려            세조          대한제국

 

신라는 469(자비왕 12)에 경도(京都)의 방리명(坊里名)을 정하여 수도의 행정조직을 정비하였고, 487(소지마립간 9)에는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 해당 관서로 하여금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함으로써 교통 도로망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수도와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 도로망의 정비는 물자의 수송을 용이하게 하여 사방의 물화(物貨)가 수도에 모이게 되었다. 이에 490년에는 서울에 시사(市肆)가 설치되어 물화 유통의 편리를 도모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지증왕(智證王)대는 권농정책(勸農政策)과 우경(牛耕)의 장려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현제(州郡縣制)의 실시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강화되어 공부(貢賦) 수취도 보다 활발해졌다.

 

5세기 이전의 신라는 재지 수장층(首長層)을 통한 공납(貢納) 지배가 주요한 재정수입원이었다. 이는 해당 지역의 특산물이나 노동력을 중앙에 복속의 징표로써 바치는 체계였다. 따라서 그 수요가 부족한 경우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지배 영역이 확대되고 국가의 일원적인 통치질서가 성립되면서 공납물로 충당할 수 없는 부분은 국가가 관영 수공업을 운영하거나 지방의 수공업자를 동원하여 조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중앙 관부와 관영 수공업장의 물품 수요 때문에 관시(官市)와 관상(官商)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에 509(지증왕)년에는 기존의 시장을 정리, 개편하여 동시를 개설하고 그 관리감독관청으로서 동시전(東市典)을 설치하였다. 동시전은 시장개폐의 시각, 도량형의 사용, 상인 간의 분쟁, 어용상품의 조달, 잉여생산물의 판매 등의 업무를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전의 관원으로는 우두머리인 감() 2, 대사(大舍: 경덕왕대에 主事로 고침) 2, 서생(書生: 경덕왕대에 司直으로 고침) 2, () 4인이 있었다. 감은 나마(奈麻)에서 대나마(大奈麻)까지의 관등소지자가, 대사는 사지(舍知)에서 나마까지의 관등소지자가, 서생은 선저지(先沮知)에서 대사까지의 관등소지자가 임명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시 및 동시전의 설치로 경주는 상업도시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 695(효소왕 4)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설치됨으로써 시장기구는 보다 정비되었다.

 

 

 

 

동시전(東市典)은 신라 22대 지증왕 10509년 경주 동시(東市)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으로 그 업무는 시장을 열고 닫는 시간, 도량형의 사용, 상인들 사이의 분쟁 해결, 왕궁에서 사용하는 물품의 조달, 잉여 생산물의 판매 등의 일을 담당했다. 경시서(京市署)고려 문종과 조선 태조원년 1392년 설치되어 시전(市廛)을 관리·감독하거나 국역(國役)의 부과 등을 맡아본 관청이다. 경시서는 세조 121466년 평시서로 개칭되어 존속하다가 고종 311894년 갑오개혁때 폐지되었다.

 

 

평식원 平式院

 

1902년 궁내부에 소속되어 자·저울 등 도량형기의 제작과 검사를 관장하던 관청.

 

189410월 내무아문의 관장하에 새로운 도량형기의 전국적 사용이 지시된 이후 평식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도량형제도의 제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때 도량의 기본을 척으로, 형의 기본을 냥으로 하고, 여기에 미터법을 겸용하는 '도량형규칙'이 제정되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관원으로는 칙임관인 총재와 부총재 각각 1, 주임관인 과장 2명과 기사 1, 그리고 판임관인 주사 4명 등이 편제되었고, 하부기구로 검정과·총무과가 있었다. 1904년에 농공상부 소속기구로 개편되었다.

 

동시전(신라)→경시서(고려) → 평시서(조선) → 평식원(1902, 대한제국)

 

순도 소수림

순도(順道)는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승려이다. 370(고국원왕 40) 전진(前秦)의 왕맹(王猛)이 연()을 공파하자 연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에 망명하였는데, 고국원왕은 그의 귀순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진으로 압송해 보냈다. 고구려의 이러한 조치는 북중국의 통일에 전력을 쏟고 있던 전진의 왕 부견(符堅)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372(소수림왕 2) 부견은 고구려에 답례로서 사신과 승려 순도를 파견하고 불상과 경문 등을 전해주었다. 이에 소수림왕은 전진에 사신과 토산물을 보내 답례하였고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순도는 뛰어난 덕행과 고상한 인품을 지녔고, 일찍부터 불교의 교화에 뜻을 두고 중국 각지를 유력하였다고 한다. 그는 주로 불교의 인과(因果)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소수림왕은 고구려 최초의 사찰인 성문사(省門寺)를 세우고 순도를 머무르게 하였다. 고려 후기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성문사가 아니라 초문사(肖門寺)라고 하였다. 한편, 순도가 고구려에 들어온 직후 동진(東晉)에서 아도(阿道)가 들어왔는데,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지어 머무르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구려 불교는 순도의 교학불교아도의 대중불교를 함께 펴나갈 수 있었다.

 

황룡사 구층 목탑 건립 건의

통도사, 황룡사 자장 율사가 건립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이 절은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규모나 사격(寺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553(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佛國土)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황룡사지는 현재 발굴이 중단된 상태인데, 앞으로의 발굴기는 상황에 따라 발굴 계속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5000여 평에 달한다. 유지(遺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중문(中門·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정형인 일탑(一塔)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신라삼보(新羅三寶) 중에서 이보(二寶)인 장륙존불(丈六尊佛)과 구층탑이 이 절에 있었고, 화성(畵聖) 솔거(率居)의 금당벽화가 이곳에 있었다. 또한, 강당은 자장(慈藏)보살계본 菩薩戒本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元曉)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을 연설한 곳으로,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하던 7일 동안에는 감로운무(甘露雲霧)가 내려 강당을 덮었다고 한다.

 

, 역대의 왕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친행(親幸)하여 100명의 고승이 모여 강()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를 열어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다.

 

이 절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은 643(선덕여왕 12)에 귀국하여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阿非知)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용춘(龍春)이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는데, 총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645(선덕여왕 14)에는 황룡사(皇龍寺)9층탑을 세우고, 2대 주지로 취임하였다.

 

또한, 이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중화(中華오월(吳越탁라(托羅응유(鷹遊말갈·단국(丹國여적(女狄예맥(濊貊)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1238(고종 25)에 몽고군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 중수되지 못하였다.

 

현재 목탑의 각 초석은 지름이 약 1m 내외로서, 사방에 8개씩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데, 그 중앙에는 심초석(心礎石)이 있다. 그 심초석은 다른 육중한 돌로 덮여 있다. 196412월에 도굴꾼이 이 심초석 안에 있던 사리함을 훔쳐갔으나, 그 뒤 도굴단의 적발과 함께 사리함을 회수하였다.

 

이 유물들을 통하여 탑에 얽힌 역사는 더욱 확실히 입증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리함은 사면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네 귀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정면 9,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 안에는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 2구의 신장상(神將像)이 있었다. 이는 서천축(西天竺)의 아쇼카왕(阿育王)이 철 57,000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도 같이 실어 보냈다는 설화를 전한다.

 

이 금과 철을 서울인 경주로 실어 와서 574(진흥왕 35) 3월에 장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5,007근으로 황금이 1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2,000근과 황금 1336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이 종도 몽고군의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절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국사

고려 시대에 만든 역사책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라 경덕왕 때인 751년에 김대성이 세웠다. 그러나 불국사의 내력을 적은 불국사 역대 고금 창기에 따르면 이 절은 528(법흥왕)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절의 규모를 크게 늘렸고, 문무왕 때인 670년에 무설전을 새로 지었으며, 751년에 낡고 규모가 작았던 이 절을 당시의 재상 김대성이 크게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자료를 참고로 할 때, 불국사는 처음에 작은 규모로 세워졌던 것을 김대성이 크게 늘려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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